빈곤을 주제로, 무려 5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있는 글로 얼마전 카카오 1분에 소개되었습니다. 한국 사회의 노동, 빈곤, 청년, 양극화가 생생하게 드러나 있습니다.이 글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빈곤'을 보게 만드는 것을 넘어서, 빈곤을 바로 보기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상상하게 해 줍니다. 물론 답답하지요. 하지만 답답함을 느끼는 만큼, 우리 스스로의 삶과 사회 전체를 돌아보게 만든다는 생각이 듭니다.일부를 발췌해 옮겨봅니다.""한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투명 인간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빈곤 노동은 투명 노동이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가난이 없다 치고' 사는 일에 길들여진 것이다. 이것은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문제다.그렇다고 빈자들이 도시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내가 만난 절대 다수의 빈곤 청년은 반지하방, 옥탑방, 고시원 등에 살고 있었다. 연립주택이 들어선 도시 곳곳에 이들이 산다. 200만~500만원의 '목돈'이 있으면 반지하방을 구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월세만 내는 고시원에 살아야 한다.다만 고시원과 반지하방과 옥탑방은 달동네와 다르다.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유대감이 없다. 얇은 벽을 두고 같은 고시원에 살아도 서로 교류하지 않는다. 한국의 빈곤은 더 이상 군집을 이루지 않는다. '원자화'된 빈곤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브라질 총기사고 사망률은 세계 최고다. 전시 수준이다. 매년 2억 인구 가운데 3만7천명이 총에 맞아 죽는다. 인구 10만 명당 19명꼴이다. 전쟁 치고도 참혹한 전쟁이다. 브라질의 총기사고 대부분은 슬럼에서 발생한다.한국에선 매년 인구 10만 명당 3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루에 43명, 연간 1만5천명이 자살한다. 어느 전쟁이 이보다 참혹한가.동서고금의 혁명 대부분이 슬럼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한국은 확실히 빈곤층에 의한 혁명 가능성을 거세했다. 한국의 빈곤층은 슬럼에서 봉기하여 궁전을 장악하는 도적떼가 될 수 없다.모든 자살을 빈곤과 직결시킬 수는 없지만, 자살은 결국 고립의 결과이고, 고립의 절대다수는 사회경제적 빈곤과 연결돼 있다. 칼을 들어 행인을 찌르는 것과 제 목을 찌르는 것의 차이는 백짓장 한 장보다 얇다. 심리적으로는 물론 물리적으로도 고립된 한국의 빈자는 살인 대신 자살을 택한다.브라질의 슬럼이 참혹한가, 한국의 지하방이 참혹한가."
가난한 청년은 왜 눈에 보이지 않는가
'진짜' 빈곤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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